아낙네 들은 해순을 앞세우고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해순이는 오장육부가 간지럽도록 시원했다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
달 그림자를 따라 멸치떼가 들었다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 중에서"
갯마을 청상과부의 사랑과 일상을 담은 오영수의 대표작 갯마을의 한 대목을 오영수의 문학비에 새겼다
갯마을은 멸치후리를 하는 갯마을 주민들의 일상을 담았는데 오영수가 일광면 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직접보고 느낀 생활상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역적인 의미도 크다하겠다
소설 갯마을은 기장군 일광면 학리항을 배경으로 창작되었고
영화감독 김수용에 의해 흑백영화로 일광면 일대의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난계(蘭溪) 오영수(吳永壽)는 울산 언양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동경 국민예술원을 졸업하고 1943년 기장으로와 일광면의 서기를 하면서
이곳에서 金東里를 만나 문학적 영향을 받고 기장을 소설 갯마을의 배경으로 삼게 된다
1945년 경남여자고등학교에 부임하였고 1949년 "남이와 엿장수"가 신천지에 실리고
1950년 "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51년 부산중학교로 전임하였다가 1954년 상경하게된다
1977년 웅촌으로 낙향하여 1979년 5월 여생을 마감하였다
보재기(해녀)의 딸인 해순은 열아홉살에 상구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고등어 잡이로 먼바다에 나갔던 상구는 폭풍을 만나 불귀의 객이되고 만다
생업을 위해 물질에 나선 해순에게 상수는 끈질긴 구애를 하고
해순은 상수와 함께 육지 살림을 위해 고향 바다를 떠난다
그러나 상수가 징용으로 끌려간 뒤 적막한 산골생활을 견디지 못한 해순은
다시 갯마을로 돌아와 멸치 후리꾼으로 나선다
멸치후리 그물당기기는 모래가 깔린 해역에서 그물을 당겨 멸치를 잡는 인기망(引寄網)이라고 하는 방식인데
배한척이 백사장에서 긴 그물의 한쪽을 끌고 바다로 나아가 고기가 모여든 자리를 둘러치면서 U자 형으로
오무리면서 백사장으로 그물을 당겨오면 후리꾼이라 불리는 마을사람들이 나와 그물을 당겨 멸치를 잡는다
(선배님 ! 오랫만에 일광에 와보니 옛날생각 나지요 / 그렇네 벌써 오십년도 넘었네 ~참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다 )
해마다 여름이면 시월의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할 선수들이 이곳에 켐프를 차리고 합숙훈련을 했었다
늙은 소나무가 서있는 언덕위에서 망을 보고있던 사령이 깃발을 흔들면서 "맬치 들어왔다 그물 땡기라"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면 선수들이 훈련을 하다가도 낮잠을 자다가도 모두 뛰쳐나와 후리기 노래에 맞춰서 그물을 당겼다
재미도 있었고 잡은 고기도 한동이 얻을 수 있었다
선배님 ! 나는 그렇게 잡은 고기 중에 모래 묻힌 타올로 칼치새끼 비늘 쓱쓱 딱아내고 회썰어 된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묵었던 그맛이 지금도 입안에서 뱅뱅 돕니더 / 니는 칼치회가 그래 맛있더나 !
나는 매운탕도 좋았지만 왕소금 뿌려서 적쇠에 꾸버 묵었던 생멸치가 최고로 맛있었다 ㅎㅎ
ㅈㅎ야 ! 배고푸다 침넘어가는 옛날 이바구 그만하고 우리 시원한 대구탕이나 한뚝배기 하러가자 ~
그렇게 좋았던 황금어장이 70년대 들어 온산공단이 생기고 어획량이 고갈되면서 멸치후리기도 사라지고
지금은 내 청춘의 추억이 되었고 하나의 민속놀이로 남게되었다
No, 13758 ♧ 이름: 백동기 ♧ 2017/12/30(토) 07:33 (WOW64,Trident/7.0,rv:11.0) 222.235.77.169 1280x720 ♧ 조회: 13 | |
![]() "갯마을" 이라는 소설을 쓴 당시 우리나라 어촌 어민이 가진 배들은 6십년대 말까지 다 범선이였다. 국내에서 어선용 소형엔진이 생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나무 송판으로 제작한 배에 뚜터운 광목천으로 만든 돗대 2개를 배 앞과 중간에 세워 놓고 바람이 불면 풍력으로 배가 움직였고 바람이 없어면 노를 저었다. 이런식으로 일기예보도 충분히 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늘만 처다보고 고기를 먼 바다까지 나가 잡으니 남자들이 풍랑에 사고를 당하여 어촌엔 과부가 더러 있었지 않았겠나이다. 여기에 제주에서 해녀들이 당시 우리나라 수출품 제1호인 홍조류인 우무가사리가 바다속 깊은 곳에서만 자라므로 육지 여인들은 능력상 채취하지 잘 못하고 제주 해녀들만 가능하여 이들이 도급제로 채취하려 와 거주하였기에 갯마을에는 여인들이 남자들 수 보다 많았지 않았나이다. 동해남부지방에는 고래가 많은 이유는 고래의 먹이인 멸치가 육지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하천수와 바다가 합수되는 곳에는 멸치의 먹이인 프랑크톤이 많아 멸치가 유달리 많이 서식하였고 이를 잡아먹으로 고래가 달려오면 멸치들은 겁을 먹고 백사장 가까이 까지 무진장 몰려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평소 수백 미터나 되는 그물을 잘 말리어 이엉으로 덮어 쌓아놓았다가 멸치가 들어 오는것 포착되면 비상종을 두둘겨 동네사람들이 자다가 삼배 옷바람으로 남녀 누구할것없이 다 달려나와 그물을 배에 실어 바다 가운데 멸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물로 차단벽을 설치하고 양 끝에 붙은 로프에 줄당기기 하듯이 매달려 백사장 위로 당겨올린다. 이런 어업방식을 "후리" 라고 하며 후리를 할수있는 어장 전체를 후리막이라고 하고 그주인은 백사장 소유자이기도 하여 농촌의 지주들 마냥 부자였다. 밤에 따닥 따닥붙어 줄당기기 하는 과정에서 총각들이나 남자들이 과부 엉등이를 쓸쩍 만지지 않겠나 하고 그러다 과부와 눈이 맞을것이다 라고 가정하여 그려낸 작품이 소설 "갯마을"이고 영화까지 제작되었다.그렇지만 어촌마을은 매우 유교적인 곳으로 윤리에 맞지 않은 남녀가 생기면 멍석말이도 행해져 마을을 떠났어야만 했을것이다. 이렇게 하여 잡은 멸치는 줄당긴 사람들에게 충분히 배분되어 멸치젓갈을 담아 팔기도 하고 1년 내내 온갖 음식에 넣어 먹기도 했다.나머지 후리막 주인몫은 풀장같이 생긴 세멘트 탱크에 소금과 함께 썩어넣어 젓갈을 담아놓았다가 6개월 정도 지난후 숙성되면 기차칸을 대절 서울 남대문시장 상인들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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