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대마도
최익현 본은 경주 호는 면암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으로 400 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과 대항해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 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은 적이 주는것이라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 세상을 떠났다
수선사는 백제의 비구니가 창건한 백제의 사찰이다 면암이 순국하고 이곳에서 장례를 치룬뒤
부산으로 이송되었고 그의 꿋꿋한 기개는 이수선사에 세워진 ;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비;
로 남아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이 추서되었다
; 조선통신사; 1404년 (태종4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
장군은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위해 각각 사절을 파견하였다
조선국왕이 파견하는 사절은 통신사 막부장군이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 하였다
에도시대에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의 행열을 맞이하던 문 고려문 이다
비운의 덕혜옹주 (고종의딸) 와 대마도주 소오다케 유키 와의 결혼봉축비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나라잃은 조선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특유의 성벽을 볼수있는 금석성 안에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가 있다
모모야마 건축시대가 마감하고 에도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누각이라한다
하치만구 (팔번궁) 신사 이신사는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것이 소위 삼한을 정복 하였다는
신화(?)속의 인물 신공황후를 모시는 신사이다 즉일본사가에 의하면 임나일본부설 의
근거가되고있는 인물이다 대마도에서 신라정벌을 하였다고믿는 신공황후를 극진히
모시는 신사를 만나는것이 좋은 기분일리가없다 그 신화를 가지고 역사를 끝없이
왜곡 시키려고하는 일본사람들의 억지가 좋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신사앞에는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두마리 짐승이 마주보고 있는데사자가 아니고 고마이누
(고려개)삽살개 이다 고마이누라는말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마와 개를 지칭하는 이누라는
일본어의 합성어이다 즉 고구려에서 건너온 개 라는말이다
오른쪽의 입을 벌린개가 숫컷이고 입을다문 왼쪽개가 암컷이다
세종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고 조선이 대마도주에게 ;태수; 라는 관직을 내리고
부산포 일부에 속하게했다는 태수란 관직명이 도리이의 뒷면에 세겨진 것으로보아
세종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무가주택;,,,대마도의 사무라이 들이살던 무가주택이고 길 이라한다
국분사,,,,1811년에는 ;역지빙례; 란 정책에 의하여 대마도에서 통신사의 초빙예식이 진행되게
되었다 역지빙례란 외국에서 오는 사절단을 에도로 들이지않고 가장 가까운 번에서 맞이하는
정책으로 따라서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인 제 12 차 통신사는 도쿠가와 막사가있는 에도로
가지못하고 대마도에서 예를 치뤄야했다
이때 통신사의 거처를 만들기위하여 대마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의 하사금을받아
급하게 사절단을 맞이할 장소를 만들었는데 이때만든 절이 국분사 이다
이틀째 대마도 여행을 마치고 내일 ;시라타게; 산행을 준비하면서
이즈하라의 만송각(여관) 에 여장을 풀었다
나의 대마도 여행을 주선해준 (유) TAITXC 사의 료코 상무(마주보는 왼쪽)가 저녁 6 시
만송각에 모시러(?)왔다 대마 최고의 음식점(?) 에서 기다리던 수토 회장에게 성찬의 저녁을
대접받고 이곳으로,,,,,,,,,,,,,,,,예약된 한팀만 받고 문 걸어닫고노는,,,,,,,,,
뒤의 수토회장 앞자리의 ㅇ ㅇ ㅇ 의장 의 과분한 칙사대접(?)에 취하는줄도 시간가는줄도 날새는
줄도 모르고 마시고 놀고 까불다가 정작 대마도에 간 목적인 ;시라다케;등산을 빵꾸 내고말았다
돌아오던길로 말년 휴가나온 아들 박병장 은 옆에두고 사위 둘 불러 앞에 앉히고 수토 회장이 들려준
박스 풀어놓고 전복에 가리비 파티로 맥주에 양주로 이렇게 사흘간의 대마도 유람을 마무리 지었다는
,,,,,,,,이야기 올려 봅니다,,,,,,,
최진사: 우짜마 낯선곳에 가서 저렇게 대접 받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밑에서 세번째 사진을 보고 또 보게 되는군요.ㅋㅋㅋ -[10/15]-
dksgmdwhd: 박재영 전우님 대마도 여행 즐거웠겠습니다.
대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 사람을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왜정 때부터 인근 큰 도시는 부산이어서 배 타고 물건 사러 부산을 드나들었고 지금도 대마도는 한국경제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마도 전통소주 야마네코(山猫)한잔 하면 기분 좋지요, 사진을 보니 이즈하라에서 놀았네요. 그런데 2탄 올라오는 속도가 느려요. -[10/15-09:48]-
안흥종: 죄송합니다. 한글로 변환하지 않고 쓰다가 이름이 영어로 나왔습니다. -[10/15-09:51]-
류지현: 구경 잘하며 내려오다가 '료코상무'가 박전우님께 보내는 눈길이 '야시꼬리'합니다ㅎㅎㅎ. 아들,사위와 한잔 하시며 대화 하시는 멋도 있으시고요. -[10/15-10:38]-
박재영: 진사님 류지현님 진짜오리지날 그림은 김중위 누님 보시고 머라카까싶어 못올리고 우리 순이보까 겁나서 못올립니다 안전우님 야마네코던지 아사히 기린 이라도 할 건수하나 만들어 봅시다 -[10/15-11:13]-
안흥종: 금년 가기 전 건수 만들어봅시다. 부산에서 공기부양 쾌속선 타면 3시간이면 후쿠오카 도착합니다.
대마도와 후쿠오카 사이에 있는 이키섬(壱岐島) 해안이 무척 아름다운 곳인데 우리나라에서 직접 가는 배는 없고 대마도나 후쿠오카에서 출발하는 배는 있습니다. 이키섬이 대마도 보다 훨씬 좋습니다. -[10/15-13:07]-
박용환: 아~!예약손님만 받고는 문닫아버리는 그런곳에서??ㅋㅋ이제는 힘이부처서..ㄲㄲ 그나저나 류전우님 말씀 마따나 거참~!요코인지 아님 료코인지..그 아즘씨 눈길이 뻑쩍지근하네요..아무래두 저정도의 눈길을 줄정도면 ..에라 나두 모르게따..==33===33 -[10/15-14:13]-
박용환: ㅋㅋㅋ!!최진사님 뎃글에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거~!밑?요게 뭡니까?저엄잖으신분이..ㅋ 저 같으믄 아래에서 3번째 요로코롬..ㄲㄲ이크.....저~꾸사리 묵기전에 요기서 더망갑니당~~ -[10/15-14:18]-
강진옥 : 몇년전 독도문제로 일본아그들이 쫑알대 쌀때 , 마산시의회에서 대마도 는 우리땅 이라고 의결 을 한일이 있읍니다 ,,,여러가지 사진자료들 을 보니까 그 말이 틀린말 이 아니네요 , 대마도나 지키러 가든지 해야 되겠다는 생각 이드네요 전우여러분 모집 광고 를 낼까요 ? 여러분 의 의사 를 묻습니다,,,,,귀한사진 보여주신 박 , 전우님 애국자 이십니다 짝짝~~~~~~~~~~ -[10/15-19:52]-
홍종만: 엉겁결에 우리 領土에서 떨어져 나간 섬(日本語:시마)입니다...朝鮮 4代 世宗大王때 對馬島를 征伐하여 倭寇의 근거지를 없애려고 한것(1419년)과 乃而浦(熊川),富山浦(東萊),鹽浦(蔚山)등 3浦를 開港하여 貿易을 許可하고 倭館을 두어 그들을 懷柔하려고 하였다...조선 太宗때부터 시행된 "搜土政策"(섬住民을本土로 移住시키는 政策)의 영향으로 바다로의 進出이 주춤한사이에 1530년(中宗25년)官撰地理書인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八道總圖에서 對馬島가 제외되어 있습니다...그후 1592년(宣祖25년)에 日本의 奇襲攻擊으로 개시된 壬辰倭亂때는 對馬島主 "宗氏"가 先鋒將의 一員으로 參戰하였습니다... -[10/15-21:43]-
홍종만: 朝鮮末 勉菴 崔益鉉으 高宗5년(36세)에 司憲府持平을 拜任하였는데 곧 上疏辭職하였다...그때 威勢를 떨치던 興宣大院君의 施政을 공격함으로써 그 일생에 큰 轉機를 이루웠다.그의 挑戰으로 마침내 大院君을 政界에서 축출하고 王의 親政이란 형식을 통하여 明成皇后 閔氏로 하여금 政權을 잡게하는 決定的 계기를 助成하였다...1904년부터 日帝가 露日戰爭의 勝勢를 몰아 朝鮮을 保護國내지 倂合하려는 野慾을 들어내자 이후 3년동안 極限鬪爭의 先鋒에 니서 身命을 君國에 바치고야 말았다...드디어 1905년10월 乙巳勒約이 맺어지자 그는 곧 賣國 5大臣의 處斬을 上疏하였고,上京하려 했으나 倭兵의 沮止로 끗을 이루지 못하였다...日帝는 끝내 굴하지않는 勉菴을 두려워한 나머지 對馬島拘囚 3년으로 1906년7월9일에 對馬島衛立營으로 옮기어 監禁하였다. 勉菴은 斷食으로서 死節을 온전히 하기로 결심하였다... -[10/15-22:56]-
홍종만: 日本 警備隊長은 곧 勉菴의 抗拒를 두려워하고 斷髮은 결코 시행치 않을것이라고 確言하기에 이르러 斷食을 중지하고 讀書로서 心身을 가다듬던 중 그해11월5일 發病하여 74세로 自命을 君國에 바쳤다...이같은 勉菴의 愛國忠節은 11월21일 그의 遺骸가 釜山港으로 돌아오자 子侄門人과 商務社員을 비롯한 수만명의 男女老少가 港頭에 나서 "春秋大義" "日月高忠"의 弔旗를 높이 들고 迎哭하였으며 이후 靈輿가 昌原,昌寧을 거쳐 육로로 定山本第에 이른 전후 약15일간 沿途附近民이 모두 白旗를 꽂고,士林과 學生과 심지어 僧侶및 妓女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弔喪하였던 事實만으로도 넉넉히 推察할수있다... -[10/15-23:46]-
홍종만: "悲運의 王子" 英親王 李垠은 朝鮮 26代 高宗皇帝의 제3 王子로서 嚴妃의 所生이다...1907년 海牙密使事件으로 인하여 日帝의 强壓으로 高宗皇帝가 억지로 책임을 지고 讓位케 되어 제1王子인 純宗이 王位에 오르자 子孫이 없는 兄님의 뒤를 이어 王世子가 된 분이다...高宗皇帝에게는 모두 4男妹가 있으니 正室인 明成皇后 閔妃는 큰 아드님 純宗을,둘째 아드님 義親王(李堈公)은 張貴人,셌째 아드님 英親王 李垠은 嚴妃가,막내 따님 德惠翁主는 梁貴人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었다...영친왕은 1907년 나이11살에 왕세자비로 책정되었던 閔閨秀(후일 "百年恨"의 著者 閔甲完여사)을 제치고 人質로서 日本으로 끌려가 高宗의 참뜻을 背叛하고 日本皇族인 梨本宮 方子와 1920년4월28일 結婚式을 거행하였다...이어서 1925년4월30일 당시12세인 덕혜옹주가 日本으로 건너왔다...고종황제가 무척이나 아끼던 따님이었다. 사실 日本이 노린것은 덕혜옹주를 일본 皇族에게 시집 보내려는 겄이었다...어린나이에 끌려오고 어린나이에 어머님을 여윈 衝擊으로 精神疾患을 얻은 옹주는 1931년5월8일 對馬島主의 아들인 宗武志 백작과 結婚式을 올렸다...結婚式을 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10/17-00:12]-
홍종만: 나는(英親王妃 方子여사) 德惠翁主가 완쾌되었다고 생각지 않았다...원래 나는 日本사람이었으므로 韓國人들에 대한 罪責感을 갖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도중에서도 가장 죄스럽게 느끼는 것이 이 德惠翁主의 無謀한 結婚에 대해서이다...다만 나 자신도 이 處事에 憤을 못이겼었다는 말을 해두고 싶다...殿下도 어쩔수 없는 立場이었다. 나는 禍가 나서 病이 날 정도였다...1951년 덕혜옹주와 宗백작도 離婚하고 말았다. 그것은 덕혜옹주가 딸을 낳은뒤 精神疾患이 재발하여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함으로서 빚어졌다. 덕혜옹주가 낳은 正惠는 多幸히 日本 明治大學을 나와 日本人과 結婚했으나 어디에서 무엇하며 사는지 所息이 없다.나는 두나라를 祖國으로 생각하고 있는 입장에서 모든것이 원만이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殿下를 따라 50년동안 보고 느끼고 생각한 가운데서 뼈아프게 우러나온것이다...金乙漢회고록"人生雜記"(一潮閣/1989년),李方子여사"지나온 歲月"(東西文化院/1974년) -[10/17-01:07]-
박재영: 홍종만 전우님 깊은 내용 좋은글 감사합니다 스쳐가듯 한바귀 돌아본 대마도 여행이었고 그렇게 돌아 보면서도 우리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것도 우리의 슬픈 역사 까지 보았고 조금음 알게 되었습니다 참아깝다 아깝다 이게 우리땅 맞는데하는 아쉬움 아타까움도 떨치지 못했습니다 엉겹결에 떨어져 나간 우리땅 이란 말씀 새삼 가슴에 와 닫는 말씀입니다 깊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또 읽으면서 내 역사의 가슴에 남기겠습니다 -[10/17-08:41]-
홍종만: 몇년전 충청남도 溫陽에서 사업할때 對馬島歷史紀行을 가려다 다른일이 겹쳐 못갔습니다...박재영 戰友님의 대마도유람기를 보고 평소 생각해오던것을 올렸습니다...戰友님의 진솔한 對馬島探訪을 잘보고있습니다... -[10/17-10:35]-
안흥종: 요즘 너무 바빠서 글 올릴 시간도 없네요, 어제 마산에서 볼일보고 부산으로 갔는데 기름 조르르한 가을 전어 생각났으나 시간이 늦어 박재영 전우님에게 전화도 못 드리고, 잡어 한접시 하고 숙박 후 아침 8시40분 항공편으로 서울 도착, 잔무 끝내고 오후3시 까지 수원 예식장 행,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전우들은 부럽기만 합니다. -[10/17-11:51]-
안흥종: 대마도는 여러 차례 답사한 곳으로 한국의 얼이 남아있는 관심 있는 곳이지요, 대마도 마지막 도주 소타케유키(宗武志)와 정략적 결혼한 덕혜옹주는 불행한 한 평생을 살았고, 딸 마사에는 결혼에 실패하고 대한해협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 곧 이어 덕혜옹주는 이혼당하는 인간적인 슬픔을 격은 것입니다. 소다케유키의 무덤은 만송원 뒷산에 묻혀있는데 무식하고 포악하고 꼽추에 병신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졌으나 동경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고운 마스크 훤칠한 키에 귀공자의 모습을 한 덕혜공주와 신혼시절 다정한 사진을 봤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조정은 일개 대마도 번 주에 지나지 않은 소타게유키를 공주의 부마로 취급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고 백안시 했습니다. 박식한 홍종만 전우님과 대마도에 얽힌 조선통신사의 역할 그리고 한반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조용히 토론 하고 싶습니다. -[10/17-12:04]-
박재영: 안전우님 우리집서 뱅기장 까지 5 분인데,,,, 전어 같이 묵자꼬 그래 약속해놓고 마산 왔다가 부산서 뱅기타고 고마 갔다꼬요 ,,,,너무 했심더 약속은 지킬때까지 유효하다 했심더 이끼섬 시간한번 맞차 보입시더 -[10/17-12:36]-
장영호: 박재영 전우님 좋은곳 다녀 오셨습니다 멋진 추억 되리라 생각 됩니다 좋은음식 나도 먹고 잡네요 ...ㅎㅎㅎ -[10/18-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