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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 왜성

남십자성 2024. 7. 19. 16:57

마눌님의 영원한 가방모찌 박영감 / 마눌님의 울산 남창온천 나들이 길에 핸들을 잡고 따라나섰다 / 오늘은 "서생포왜성" 을 찿아 역사 공부를 한다 ㅎㅎ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26년) 5월부터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여 돌로 쌓은 16세기 말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해발 133m 고지의 정상에 내성을 쌓고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단 3단의 부곽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 산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외성을 배치하였고 성벽 밖에는 2중 3중으로 호를 둘렀다 

성곽의 전체면적이 호를 포함하여 46.000평에 이르고 호를 제외한 성 외각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 거리는 동서약 870M 남북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 지역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현재 산정에는 높이 약5M의 천수대가 남아 있으며 성의 내 외부에서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 

성벽은 외성의 경우 바같쪽에만 돌로 쌓은 내탁식으로 하고 내성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 하였다 

1954년 (선조 27년)부터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곳에 와 평화교섭을 하였으며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598년 (선조 31년) 명나라 마귀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다시 빼았았다 

1년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임란공신을 배향하기 위해 창표사(倉表寺)세웠다 이후 창표사는 파괴 되어 터맘 남았다가 2016년 11월 복원되었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까지 얃 300년동안 조선 수군의 동첨절재사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에서 옮겨온 글이다 )

(아래로는 내가 일본의 구마모토城을 둘러보면서 서생城과 구마모토 城에 얽힌 역사를 비교하며 배우고 익혔던 내용을 옮겨 적어본다)

일본의 구마모토城은 오사카城 나고야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으로 원래 구축되었던 작은 성들을 포함하여 1607년에 개축한 성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가토기요마사"가 7년만에 완성한 성이며 가토가 축성할 당시 많은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하여 은행나무 성이라는 별명도 붙어있다 

구마모토성은  성루49개  성루문 18개 성문29개 120개의 우물이 있었지만 1877년 세이난 전쟁으로 대부분소실 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되었다 쥐새끼 조차도 오르지 못한다는 뜻으로 "네즈 미가야시"라는 말이 있을만큼 대단히 웅장하고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어 졌다 

임진왜란당시 "도꾸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장였던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 는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입하여 울산 서생성을 축조해 주둔을 했다 이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7년 (음력 12월 23일) 가토기요마사의 군사 15'000명이 지키는 울산 왜성을 공격했다 

성이 완전히 포위된 가토기요마사의 군대는 말을 죽여 식량을 삼고 그피를 마실 정도로 고통을 받았지만 왜의 구원병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방위성을 뚦음으로서 연합군은 끝내 울산 왜성을 함락 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가신이었던 기요마사는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울산 왜성에서 철수하게된다 

이때 기요마사 (가등청정)가 철수 하는것을 본 울산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 라고 환호 하면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이 경상도식 발음으로 변형되어 지금의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가 되었다고 한다 /  조 명 연합군에게 그렇게 식겁을 당하고 돌아간 기요마사는 울산성에서 당한 뼈아픈 경험을 살려 전쟁에 대비해 쌓은 구마모토성의 비상식량으로 고구마 줄기로 다다미를 짜면서 속에는 말린 고사리로 채워넣고 성 안에 120여개의 우물을 파고 식량으로 쓰기위해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구마모토성을 은행나무 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도 428년이 되었다 임진란 기간중 우리측 에서는 사명당 등이 나서 4차례나 울산서생포왜성을 찿아가 기요마사에게 휴전을 제의했으나 너무나 큰것을 요구하였다 그중 하나가 조선8도중 남쪽4개도를 양여하라는 것이다 결국은 명나라 "마귀제독"과 "편갈승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물러 났지만 그 동안에 많은 울산지역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 갔었다 전후 마귀장군과 편갈승 장군은 울산의 자연환경에 반해 울산에 정착해 살았다 조정에서는 서생성에 "창표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임진왜란때 희생한 사람들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재사를 모시게 했었는데 이후 일제강점기 시대에 철거 되었다 

최근에 "西生"이라는 性氏를 가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찿아 서생에 나타나 화재가 되기도 했는데 이분들의 先祖는 울주군 서생이 고향이라고 했다 가토기요마사와 서생성은 우리에게 이와같은 슬픈역사가 있는 서생성에서 진하와 동해바다를 본다 

 

#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8월 도요토미 정권의 일본군이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승리했지만 쌍방 모두 극심한 피해를 보았던 재란이었다 #


 백동기: 50연대 후반기 초등학교 시절 이곳 성내꼭대기 천수각이 있었을법한 곳에 봄 소풍을 온적이 있다.보물찾기도 하면서 산토끼들이 잔듸위에서 뛰놀고 있는것을 보면서 선생님의 말씀 즉 왜성의 유래를 말씀하시는것 들어면서 즐겁게 보낸 기억이고 그때 성이 완전한 형태를 느낄만큼 잘 보존되고 있었고 아래 성벽에서 명선도 옆의 강하구까지 성이 군데 군데 연결되어 있었서 왜군의 탈출구가 되었다고 하셨다.이 왜성을 축성한 이유는 왜군이 퇴각하면서 본국에 돌아갈수있는 배가 도착하기까지 살아남기 위한곳이라고 배웠다.지금처럼 많이 훼손된 시기는 강 하구 동쪽에 온산공단이 들어서고 성 주변이 울산시나 울산공단 출퇴근 생활권이 되고 또 왜성이다 보니 보존관리 밖이였지 안았나이다. -[07/24-13:24]-


 김병장: 90년대 초 울산시와 울주군 도시계획 도로 현황 조사 참여시 두달 동안... 태화강 맑은 물과 온산 공단 주변과 많은 배나무 밭이 생각 납니다...덕하 도로 주변 배나무 밭 조사시 주인들이 배를 바구니로 가져와 팀원들이 실컷 먹으라고 하면서 다른 배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 하시든 생각이 납니다...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07/24-17:00]-


 백동기: 울산에 공단이 생기기 전까지 당도가 높은배가 유명했다. 이유는 배가 밤낮 소금끼를 간직한 해풍속에서 영글어가기 때문이다.단팟죽에 소금을 조금 뿌리면 더달아아지는 원리로 지중해 연안 과일이 더달아 이원리라고 한다. -[07/24-23:09]-


 최현득 : 아픈역사를 담담하게 기술하는 솜씨에 존경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07/26-2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