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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세상 아름다운이야기

남십자성 2020. 3. 26. 22:55

오늘 아침 조간 부산일보에 가슴뭉클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그땐 그랫습니다  

우린 학교가 미군에 징발당하고 교실이 없어 아침이면 동내 뒷산에 모여 소나무에 아주작은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를 하다 비가오면 그대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쫒겨가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얼마후 한국군 5연대가 주둔하고 떠난 자리에 가교사를 지어 공부하다 4학년이 되면서 본교건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기막힌 이야기 입니다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동내뒷산은 피난민들이 지은 판자 보루박스로 지은 움막집들이 들어찼고 낮선 피난민 친구들이

 전학을 와 한반이 60명에서 75명으로 늘어나기 까지 했으니까요  아침이면 깡통을 들고 집집을 다니며 "밥쫌주세요"

하면서 동내를 돌던 서울내기 피난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울어머님 항상 피난민 아이들에게 줄 밥을 따로 퍼놓고

기다리다 조금씩 나누어 주곤 했지요  그 친구들이 학교에가면 다시 만나던 우리반 친구이기도 했답니다

1995년 우리학교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국민학교 하나의 기념행사가 아니라

 부산시내가 들썩거린 그런 잔치였습니다

역사가 역사인 만큼 성공하시고 훌륭한 선배님들이 다 모였습니다

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안효상 선배님하며 국회의원 정도는 앞자리에 앉지도 못할만큼 대단한 행사였습니다

위의 사진한장이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이한 우리반 친구들의 유일한 졸업앨범인데 70명의 친구들이

 졸업을 했네요 그날 행사에 20명의 반친구들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송도 횟집에서 가진

 2차 회식자리 였습니다  누구라도 알만한 제약회사 상무로있던 친구왈

 "정수야 ! 내 니 밴또모치 아이가 내 진짜 니 평생 못잊는다 " 

무슨말인가 하면 우리반 70명중에서 20명 정도는 밴또를 가지고 올 형편이 못되는 친구였습니다

 선생님이 형편이 나은 친구 10명에게 밴또 2개씩 를 가지고  오게 해서 1 :2로 짝을 지어 밴또를

 나누어 먹게 했습니다  즉 상무 친구는 정수에게 이틀에 밴또 하나씩 받아먹고 공부를 했다는 겁니다

  그시절 우리에겐 밴또모치 친구가 있었던 그런 세월을 살아 왔네요 

 오늘 신문광고를 보면서 밴또모치 친구들이 그리워 몆자 적어봅니다




210.103.123.178


김 영: 어린 시절 아침 식사때 마다 들리는 "밥 좀 주세요..예~"라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듯 합니다...깡보리밥 이지만 언제나 숟갈로 퍼서 담아주시던 어머니..."니들 또래 아이라 너무 불쌍하다" 라고 말하실때... 우리 형제는 깡보리밥 이지만 얻어 먹지 않아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고교 시절 밀가루를 동사무소에서 배급 받아 아침엔 수제비,저녁엔 칼국수...도시락을 싸지 못하고 뚜겅을 들고 한바퀴 돌면 배가 부를 정도의 밥이 됬으니...지난날 거의 모두가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이웃이 음식도 나눠 먹고 인심은 좋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세상은 돌고 돈다 라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미국 트럼프가 한국은 부자 나라니 방위비 많이 내라고 한다 라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외국에 비행기 타고 가서 골프도 치고 오는 분들도 많다는 말도 듣고요...우리나라 부자 됬습니다...자유롭고 평화롭고 부요한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기를 소원합니다...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글을 보니 길어졌습니다...부산 박재영 사령관 전우님 항상 건강하시고 사모님도 잘 모시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03/27-06:31]-


121.166.193.168 최진사: 우리가 어릴때 겪었던 625 전쟁피해를 어찌 잊겠습니까? 춥기는 왜 그리 추웠을까요? 그래도 그때는 이웃을 배려하는 정이 있었을때 입니다. 나이들어 그때 받았던 은덕을 잊지않는 사람들이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가슴 뭉클한 사연이네요. -[03/27-06:36]-


114.203.238.115 백동기: 어릴쩍 까막듯한 기억속의 동란시절 부산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군복 등에 검은 페인트로 P자를 세겨 놓은 이들의 모습을 거제리에서도 서면 로타리 동쪽에서도 보였다.지금 부전지하철역 5거리에는 거대한 물탱크가 있었고 급수 운반 터럭들이 무수히 다녔고 길거리 마다 물반 밀가루 반으로 만들어진 거지빵 리어커가 많았고 이걸 먹고서 피난민들은 끼를 떼웠다.미군 상대 양공주들이 주택가에 불구하고 공공연히 많았는데 재수가 좋았던 양공주는 휴전과 더불어 미국으로 많이 건너가 학교 동급생 중에는 시설에서 다녔던 고아와 미국에 건너간 누나들오 부터 학비 지원을 받았던 친구도 있었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젠 그와같은 전쟁이 발발 하드라도 여성들 외에는 대부분 군대을 다녀와 사격이나 분대전투훈련이 되어있어 그때 만양 부산까지 밀리지도 않을것이고 혼란도 덜할것 같아 꼭 군대에는 다녀와야 한다. -[03/27-09:54]-


114.203.238.115 백동기: 우리나라 초등학교 역사를 보면 대도시 지역은 독지가들이 설립한 학숙형 학교가 있어서 농촌 대 지주들의 자녀들이 하인 즉 종이 고삐를 잡은 말을 타고서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에 갔다가 방학 때면 집으로 돌아오며 공부를 했었고 1910년 한일 합방 후에는 총독부가 교육령을 만들어 대도시 부터 확대, 면 소재지에는 1923경에 1개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아마 봉래 초등학교는 개교 역사를 보면서 추측해 보면 독지가가 설립하고 부잣집 자녀들이 다녔던 학숙형 학교로 출발되어진 학교인것 같다. -[03/27-10:17]-


210.103.123.178 김 영: 1920년대 초등학교만 졸업을 하여도 군수,경찰서장,역장을 했다 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청*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나와 보통고시 합격하고...5공때 국세청장도 하고 정부투자기관 사장도 했습니다...누구나 가는 요즘 대학은 좀 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입니다...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03/27-11:46]-


210.103.123.178 김 영: 수변로 걷고 다시 한번 글을 봅니다...어린시절 옆집 운용이가 들고 다니며 한조각 주는 빵 맛이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지금도 있을수가 없습니다...빵을 냄새나는 운용이 집 부엌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인심 좋은 고교 선생님이신 운용이 엄마는 저에게도 한개를 주셨고...찐감자를 으깨어 계란을 풀고 여러가지 넣고 뭉쳐 튀김가루 입혀 튀긴 빵...나중에 알고 보니 "고로케" 요즘도 빵집에 가면 어김없이 고로케 두어개 사먹습니다...눈감으면 떠오르는 운용이 엄마 또 운용이...서울 종로에서 이름을 날린 화가요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은퇴했고...운용이 엄마는 고교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하시고 백수를 다하셨고...아름다운 지난날의 추억이 활동사진 처럼 지나갑니다...박사령관과 가진터널을 통해 거제도 일주까지... 멍게비빔밥 생각도 나고요...잊지 못하고 고맙습니다...항상 건강하시고 사모님 모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03/27-16:30]-




114.203.238.115 백동기: 부산에서 처음 중학교를 다닐때 봉래초등학교 출신들이 있었다.영도 봉래동에 있는 초등학교 쯤으로 이해했었는데 박 전우님이 모교 이기에 구체적으로 소개하는것 보니 대단한 학교이다.우리나라 최초 고관 대작들의 자녀들 신식교육을 위해 설립된 초등학교가 1894년에 개교한 서울 교동초동학교인데 1년 뒤 부산봉래초등학교가 개교를 했으니 한강 이남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초등학교가 아니겠는가이다.부산은 1876년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 조건에 따라 일인들은 치외법권을 가지면서 인천,부산,원산이 개항되어 당시 부산 왜관을 중심으로 일인들이 많이 살아 국제적인 도시가 되어 교육 욕구도 자연 높아서 그때 개교했어니 박 전우님의 긍지 돗보임니다. -[03/27-20:34]-


58.238.250.25 류지현: 대구쪽에도 피란민이 많았는기라예 그때 삼천리 버스정류소가 우리집이라 아버님께서 어린애둘과 보따리를 들고오신 부부를 모시고 오셨는데 우선 안방으로 모시고 비워있던 방에 군불을 지피시고 ...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아저씨 부부께선 우리집옆 정류소에서 리어카 국화빵과 찐빵장사를 2년여 하시다가 방2개짜리 집으로 이사 하셔서 어린마음에도 섭섭했다 그땐 방세를 받는일도 없고 가족같이 지냈는데 돈모아 집을 구하시려고 그분들의 하신일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신 북쪽 피난민이셨다 한해 먼저 국민학교 입학했던 박영식이형! 그리고 나보다 한해 늣게 입학했던 박영선이 여동생! 입하나 줄이겠다고 세살 많던 영숙이 누나를 식모겸 두었다던 애기를 올때부터 안하고 이사하던날 다섯식구가 울며 만나던 때가 기억이나고 중3때인가 고1때쯤 당시 주류계통 "백구소주"대리점을 하시다가 모든것을 접고 통일이 되면 먼저 고향땅에 가신다며 강원도쪽으로 가시고도 아버님께 소식 주셨다는데 군생활 땜에... 피난살이 고생하셨던 분들이 생각 납니다. -[03/28-00:25]-


116.120.236.47 김진화 : 오늘 박전우님의 화두가 우리들의 힘들었지만
지나고나니 마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그시절을 되새
기게 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댓글로 이어가는 우리 전우님들
코로나 이겨내고 함 보입시더. -[03/28-07:31]-


홍종만: 흘러간 그 歲月의 歌謠 , 玄仁 선생의 <굳세여라 금순아!>, 南仁樹 선생의 <離別의 釜山停車場>을 특히 좋아하시던 先親을 생각합니다.
1951년1.4後退 嚴冬雪寒의 날씨에 걸어서 避亂간 저희는 釜山까지는 가지못했고 忠淸南道 禮山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 어버지는 徵集되어 軍隊가셨고
어린 4男妹를 데리고,1년에 걸친 힘들고 어려웠던 피난생활 이야기를 들었던 記憶이 남니다.
-[03/28-18:14]-


115.139.176.14 박용환: 피난으로 화재이군요 1,4후퇴때는 집뒤에서 사무소를 차려놓은 인민군들이 자리를 이동한사이에 가족들이 피난을 떠나야겟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밤세도록 걷고 걸어서 오산 모 강앞까지 도달후 얼은강을 해병대 군인이 저를 안아서 건너주면서 펑펑 울더랍니다,,울면서 하는말이 미국이 도와주려면 확실히 도와주지 뭔 진격했다가 도루 후퇴를하느냐며,아마 그때 그 해병은 중공놈들이 참여한걸 모르고 있었던거같습니다,, -[03/29-11:13]-


58.122.131.79 장세영: 7월20일 대전상실 미24사단장 딘 소장 실종.21일 전주와 남원진격 22일 정읍 점령23일 광주점령 순천접근 25일 목포진입 26일 북한6사단 하동침입
27일 채병덕소장 하동에서 전사 8월7일 진주탈환작전 전개 10일 진주탈환
조부모와 본인만 집에 있으며 소련제3륜 오토바이 운전하는 북한군과 코앞에서 불시 조우한 순간을 잊을수 없습니다.조부모는 순간 혼비백산 긴급도피 -[03/29-14:05]-


58.122.131.79 장세영: 진주는 적점령 지배를 2주동안 지내는동안 동별 마을별 적군 뿌락치 조직중에 탈탄 되었고 수복후 공산군 앞잡이한 마을 청장년 소동나 어수선한 시대였지요. 옆집포격으로 순간놀라 울기도하고 비행포격으로 축담 마루 아래로
숨어며 할머니 빨리 내위에 엎드려라고 하며 비행기 기총소사에 놀란일들... -[03/29-14:20]-


210.103.123.178 김 영: 어린 시절 보리밭에 이삭을 모닥불에 그슬려 손바닥이 시커멓게 비벼 후 후~불어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세월이 쉬지 않고 흘러 60여년이 지났으니...모든 전우님들이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03/29-16:19]-


58.233.106.136 백하사: 진주에는 한국군의 채병덕 소장이 있었다.채 소장은 미군에게 악화되는 상항을 알린 후 비록 예하에 병력이 몇 명
되지는 않지만 미군에 합류하도록 해달라고 졸랐다.이틀날 하동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채 소장과 미군 지휘부는
새로 준비한 방어진지로 병사 무리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이들 중 상당수는 미군 전투복을 입었으나, 일부는
인민군의 겨자색 전투복을 걸쳤다. 이 잡다한 무리가100미터 전방까지 다가오자 채 소장이 앞으로나서서 물었다,
어느부대 소속인가.이 무리는 순식간에 도랑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로에 있던 미군도 기관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도랑 속의 적뿐 아니라 북쪽 고지로 올라간 적으로부터 총알리 날아왔다. 머리에 총알을 맞은 채병덕 소장은 동맥에
서 피가 흥건하게 뿜어져나오며 사망했다.끝까지 충성스러웠던 전속부관 2명은 총탄이 날아다니는 데도 채 장군의
시신을 수숩해트럭에 실었다.채병덕 소장은 그간 저지른 실수와 실패가 무엇이었든 간에 어쨌든 최후에
군인으로 죽었다, 적의 공격을 받은 미 29연대 3대대는 적의 강한 화력 공격을 받았으며 양방향에서 � -[03/29-20:12]-